교우분들 이야기 제8편 김진숙(로사) 자매님 산티아고 가는길

20111115일 평화스러운 길들

ESTELLA    LOS ARCOS  21KM

다른 순례자들이 떠난 다음에 무심코 냉장고를 열어 보니 포장된 김치가 꽝꽝 얼어 있었다. 한국에서부터 가지고 온 것 같은데 며칠을등에지고다녔을그귀한김치를무거워서놓고간것 같았다. 우리에게도 말 그대로 그림의 떡이었다. 얼었으니 당장 먹을 수 없고 가지고 가자니 무겁고. 한국 사람들이 다녀간 흔적이 오늘처럼 알베르게 곳곳에 남아 있었다. 라면으로 아침을 해결하고 어젯밤에 빨아 널었던 옷을 다 마르지도 않은 채로 입고 나섰다.

제법 큰 도시인 시내를 벗어났다. 마을 입구부터 비탈길을 걸어 조금 가니 아예기 (Ayegui) 가 나타나며 양쪽이 포도밭인 길로 이어졌다. 전설적인 이라체 수도원 (Monasterio de Irache) 의 와인 생산 공장을 그냥 지나쳐 버렸다. 왼쪽 수도꼭지를 틀면 포도주가 나오고 오른쪽 수도꼭지에서는 물이 나온다는 그 유명한 곳. 올라오면서 시큼한 냄새도 맡고 수도원 앞에서 사진도 찍었는데 지나치고 나서 생각이 났다. 나만 갔다 오라는 언니를 졸라서 택시를 타고 갔다 오기로 결정하고 산책하는 아줌마에게 물어보니 이곳은 택시가 없다고 했다. 우왕좌왕 하고 있는데 어느 건물 앞의 아저씨가 자기 차를 주차 시키려고 하다가 우리에게 다가왔다. 이라체 수도원을 지나쳐와 되돌아 가고 싶다고 한참 설명을 해도 못 알아들어 왼쪽은 와인 (Vino) 오른쪽은 물 (Agua) 이라고 손짓을 하니 그제서야 알아 듣고 차에 태워 주었다. 사례하고 싶었지만 절대로 돈을 받지 않았다. 친절한 아저씨가 아무리 생각해도 고마웠다.

이라체 수도원에서는 정말 한쪽에서는 포도주, 다른 한쪽에서는 물이 나왔다. ‘All you can drink’라서 포도주를 두 컵 마시고 물병에도 포도주를 담아 나오는데 벤딩머신에 과자를 넣고 있던 아저씨가 더 마시라는 표정으로 선하게 웃고 있었다. 저렇게 평화로운 표정이 깃든 사람들에게도 걱정거리가 있을까? 카미노를 걸으면서 느끼는 것이지만, 스페인 시골 마을처럼 평화로운 곳은 없을 것 같았다. 와이너리 고장답게 끝도 보이지 않는 포도밭을 새삼스레 바라보니 기하학적인 선들로 보인다. 처음부터 이렇게 넓고 멋진 포도밭은 아니었을 텐데. 오랜 세월 대를 이어 가꾸어온 농부들의 노고가 눈에 보이는 듯하였다.

투명하고 청량한 하늘에 구름 한 점 없었다. 11월인데도 따뜻한 봄날 같았다. 덥기까지 했다. 바람 부는 방향에 따라 풀들이 조금씩 일렁이고 양 옆으로는 파아란 싹들이 끝없이 이어졌다. 겨울을 지낼 노적가리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평화로운 평원이 계속 펼쳐지며 또 다시 포도밭이 시작되었다. 서리를 맞고 아직도 매달려 있는 포도송이들. 언니와 나는 간식으로 가끔 포도를 따서 먹기도 하고 나무 그늘에 앉아 쉬기도 하면서 같이 주님의 기도를 불러보았다. 다가갈수록 멀어지는 것 같은 끝없는 포도밭과 밀밭 길을 걷고 또 걸었다.

로스 아르코스 (Los Arcos) 에 도착하였다. 15~16세기에 카스티야 왕국과 나바라 왕국의 경계 지점에 위치하여 두 왕국 어느 곳에도세금을내지않아부를이뤘던마을이라고한다.잠시멈춰 서서 고즈넉하고 평화스러운 마을을 바라보았다. 매일 마을 언저리에 도착할 때쯤에는 멀리서 성당 종소리가 들려오고 한발 한발 옮길 때마다 색채가 변하는 아름다운 저녁 하늘과 노을에 물든 들판이 펼쳐졌다.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 리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박목월 시인의 나그네를 읊으며 나도 저절로 시인이 되었다.

발코니를 꽃 화분으로 장식하고 문장이 새겨져 있는 집들이 촘촘히 들어선 좁은 골목을 지나니 문이 닫혀 있는 산타 마리아 성당이 보였다. 잠시 후 알베르게에 도착하여 크레덴시알에 스탬프를 받았다. 피곤한 중에도 스탬프를 받을 때는 희열을 느낀다. 오늘 하루의 목표를 성취해서일까 아니면 고단함을 견디어 낸 내 자신이 대견해서일까, 또 아니면 나 혼자 만드는 소중한 시간의 고리가 하나하나 완성되어 가는 뿌듯함일까.

제법 큰 호텔을 찾았는데 직원도 없고 문도 잠겨 있었다. 20분 동안 문을 두드리니 근처에 있던 사람이 주인 같은 사람을 데리고 왔다. 영어가 한 마디도 통하지 않았지만 52유로를 지불하고 방에 들어가자마자 빨래를 해서 스팀에 널어 놓았다. 스페인은 대부분 난방시설이 스팀이어서 빨래 말리기에는 최고였다.

남편에게 전화를 하기 위해 혼자 밖으로 나와 공중전화를 찾으니 젊은 아가씨가 전화를 쓰고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고 왔으나 그때까지 통화를 하고 있었다. 우리나라는 유치원생도 휴대전화가 있는데 여기는 곳곳에 공중전화가 설치되어 있는 것을 보면 아직 휴대전화가 많이 보급되지 않은 것 같았다. 공중전화 사용법을 알고 있었는데도 성공 하지 못하고 4유로를 기계에 바쳤다. 집에서 걱정할 텐데….

저녁을 먹으러 호텔에 있는 레스토랑으로 가 몇 가지 안되는메뉴중하필이면작은새우딱네 마리만 들어있는 맛없는 국수를 시켜 먹었다. 배가 고파 먹었는데 저녁을 먹고 나서도 배가

고팠다. 내 몸에 남아 있는 에너지가 없는 탓인지 무엇을 먹으나 안 먹으나 항상 허기가 졌다. 식당을 나오면서 보니 여러 테이블에서 할머니들이 포커를 즐기고 계셨다. 역시 이곳도 할머니들이 장수함에는 틀림이 없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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