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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성령쇄신운동의 문제점

가톨릭 성령쇄신운동의 문제점

때로 여러분은 가톨릭 성령쇄신에 관한 불만의 소리를 어떤 외부인이나 아니면 회원이었다가 떨어져 나간 사람들로부터 들을 때가 있습니다. 이 FAQ(자주 듣는 질문들)는 그런 것들중 대표적인 것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혹자는 이르기를 은사(charisms)를 원하는 것은 교만이라고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고린토 전서 14장에서 성령의 은사를 갈망하라고 말합니다. 왜일까요? 그것은 우리의 종교가 단지 말뿐인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초자연적인 인간 역사에의 개입을 경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것은 주로 부활을 의미 하지만, 은사들을 통하여서 지속적으로 드러내시는 부활의 힘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은사들이 신이 인간과 연결되는 유일한 방법입니까?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심지어 가장 중요한 축에 들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것들이 당신 교회에 충분한 활력을 불어 넣으시기 위해 필수적이라고 판단하신 것같습니다. 성령의 은사들이 거룩함(holiness)을 결코 대신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은사들은 우리를 거룩함에로 인도합니다.

 

은사의 활용은, 영의 현존감이나 기도의 효과나 또는 다른 영성적인 보화들을 동반하기 때문에 우리를 교만하게 할 수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인간이란 본래 자신이 열의를 가지고 행하는 모든 것에서, 심지어 그것이 아무리 영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교만에 빠지게 마련입니다. 예컨대, 우리는 마더 데레사도 그녀의 엄청난 업적들로 유명 해졌기때문에 교만의 죄를 고해했으리라고 추측합니다. 그녀는 일주일에 한번씩 고해소에 갔었노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녀가 적어도 일주일에 한번씩은 죄를 지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분이 그 죄들 중에서 전혀 교만의 죄는 없었다면 그것은 매우 비상식적인 일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녀가 단지 교만에 빠지는 유혹을 피하기 위해서 불쌍한 이들을 돕는 것을 중단하려 하지는 않았으리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그러한 하느님의 엄청난 역사하심의 도구로 쓰이는 것때문에 때로 교만에 빠진다고 해서 은사를 추구하는 것을 그만두어서는 안되겠습니다.

 

혹자는 은사현현을 신성한 웃음(holy laughter)이나 개처럼 짖는 것과 함께 묶어서 취급합니다.

어떤 은사수행자들(또는 성령봉사자, Charismatics)은 너무 극적으로 치우치다 보니까 다분히 지엽적인 영적 경험들을 추구하기도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신성한 웃음과 개처럼 짖는 것은 은사활동으로 볼수 없습니다. (이것은 토론토의 개신교 교회의 성령세례때 일어났던 경험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것들은 영적 현상으로는 취급될수 있으나 엄격한 분별을 요하는 일입니다.

 

혹자는 은사를 수련하기보다는 거룩함을 추구하는 것에 보다 중점을 두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 말은 꽤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하느님의 방식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결코 하느님 보시기에 충분히 훌륭하게 거룩한 상태에는 도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베드로 사도의 경우만 보아도, 오순절 강론에서 삼천명을 회개 시키는 능력을 발휘했지만, 나중에 비겁한 행동으로 바오로 사도에게 엄청난 망신을 겪은 일이 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하느님은 우리를 당신의 도구로 쓰시기 위해 어떤 거룩함의 최소기준 따위를 요구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이 온 인류에게 어떻게든 당신 자신을 주시기 위해 여념이 없으신 분이기 때문에, 그다지 정결해 보이지 않는 수단들마저도 쓰시는 것입니다. 물론, 그분은 우리가 더더욱 거룩해 지기를 원하십니다. 사실인즉, 거의 모든 은사수행자들은 이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으며, 거룩함을 항상 추구하고 있습니다.

 

혹자는 이르기를 어떤 은사현현이 진실인지를 가리는 분별이 충분히 행해지고 있지 않다고 합니다.

이것은 의미있는 비판입니다. 왜냐하면 어떤 것이 하느님의 기적이라고 주장하는 많은 것들이 가짜인것처럼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문제는 성령쇄신운동보다 폭넓은 문제입니다. 마리아 운동 (Marian Movement)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그것에는 훨씬 적은 분별이 적용되었었습니다. 수백만의 가톨릭신자들이 지난 2천여년간 영적 체험들을 했고, 그들중의 대부분은 분별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매우 적은 수의 사건들만이 교회에 분별이 요청되었고, 그 중에서도 아주 소수만이 진짜일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판명되었습니다.

 

더 잘된 것인지 아닌지 모르지만, 교회측은 사실은 여기에 별로 관심이 없으며, 이 모든 체험들을 분별할 준비도 되어있지 않습니다.

 

교리에서는 은사현현을 교회측에 보고하도록 되어 있지만, 매일 일상적으로 발생하는 은사현현이라기 보다는 교회 전체에 영향을 강하게 끼치는 경우들이라고 보는 것이 합당하겠습니다.

 

혹자는 이르기를 은사수행자들은 전통적인 교회의 신앙방식에 관심이 없다고 말합니다.

많은 수의 은사수행자들은 매우 많이 “로사리오”기도를 바치고 있습니다. 현대 마리아 운동의 많은 부분이 은사수행자들에 의해서 촉진되었습니다.

 

사실 은사적 활동들은 로사리오보다도 더욱 전통을 지닌 것입니다. 교회는 처음 천년간은 로사리오 없이도 홀로 유지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은사활동은 교회의 바로 시작부터 그 성장에 기폭제와도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Butler의 “성인들의 생애(Lives of the Saints)”를 읽어 보신다면, 은사활동이 교회에 매세기마다 복음이 전파된 세계의 모든 곳에서 일어나고 있었음을 알게 될것입니다.

 

혹자는 이르기를 은사수행자들은 기도의 “메마름의 시기” 같은 것은 잘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 분은 아마도 은사수행자들이 기도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성령)대회에 별로 참석해 본 적이 없는 분이실 것입니다. 이 것은 그런 대회에서 일상적으로 등장하는 화제입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성인들은 이 메마름을 체험했었고, 우리도 이것을 체험하고 있습니다. 이 것은 성장의 한 과정입니다. 기도에서의 메마름은 하느님의 은총이 부족해진 것이 아닙니다. 그 것은 대개 감각적 위안이 줄어든 상태입니다. 이런 위안은 하느님이 한 개인에게 강하게 역사하시는 동안에도 없을수가 있습니다. 기도의 메마름과 하느님의 역사하심과 직접적 연관을 짓는 것은 타당하지 않습니다.

 

혹자는 주장하기를 “성령에 압도되어 쓰러지는 것”은 어떠한 성인전에서도 본 적이 없다고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한번은 종교재판에 회부된 적이 있는데, 그 이유는 설교 도중 어떤 여인이 기절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사실인즉, 너무 많은 사람들이 스페인의 거리에서 그의 설교를 듣다가 성령에 압도되어 기절해 버리곤 해서 이 것이 교회측에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었다고 합니다.

혹자는 성령세례라는 용어가 신부님들이나 성인들에 의해 쓰였느지 아니면 그것이 어떤 교리적인 체계가 있는지를 의문시 합니다.

 

여러 학자들이 이것을 위해 일하고 있습니다. 역사를 통틀어, 초대 교회 신부들이 체험했던 성령세례의 실제를 추적하고 있습니다. 이것에 관한 주목할만한 작업은 맥도넬신부와 몬테규신부에 의해서 작성된 “그리스도교의 시작과 성령세례” (Christian Initiation and Baptism in the Holy Spirit) 라는 책이 있습니다.

혹자는 성령쇄신운동에 주도적인 어떤 수호성인이 있느냐고 알고 싶어 합니다.

 

다른 예배형태(devotions)의 경우와는 달리 성령운동에는 교회공동체에 새로운 식견(insight)을 제공하는 점은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주장하는 그 정도로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오히려 우리를 신앙생활의 근원점으로 돌아가게 합니다. 바로, 부활하신 주님이나, 주님이 우리에게 부어주신 성령과 같은 것이지요.

혹자는 자기들이 성령쇄신을 거부한 것때문에 지옥에 가게 될것이라는 얘기를 들었다고 합니다.

진정한 가톨릭 성령쇄신 지도자는 이와같은 주장을 결코 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가톨릭 성령쇄신 국제 지도자 협의회에서 자주 발표한 바와 같습니다.

 

초기의 가톨릭 성령쇄신은 규모 있는 개신교 오순절 교회들중의 일부 지도자들에 의해서 영향을 받았었기때문에 우리가 그러한 교리원칙을 받아 들이기 쉬울 수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그와같은 얘기를 들었노라고 주장하는 지도 모릅니다. 어떤 오순절 교파는 성령세례를 받고 방언을 하지 못하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주장했었습니다. 오늘날에는 많은 지도자들이 그런 경직된 사고에서 벗어났습니다.

하지만, 주류 교파의 성령운동 초기 지도자들은 그러한 경직된 원칙을 거부했기 때문에 애초부터 가톨릭 영성이론에는 이러한 경험이 바탕을 이룰수 있었습니다.

 

혹자는 성령쇄신의 너무 많은 요소들이 개신교와 공유되어 있기 때문에 진실성을 의심한다고 합니다.

가톨릭과 개신교는 많은 것을 공유합니다. 예를 들면, 개인 기도의 중요성이랄지, 열심히 성서를 읽는 것이랄지, 복음전파 사명의 중요성이랄지, 회개의 필요성, 그리스도의 재림의 기대, 그리스도처럼 살고자 하는 열망등 무수한 것들이 있습니다. 어떤 개신교들은 적어도 외관상으로는 우리의 성사를 공유하기도 합니다. 우리 가톨릭이 이 모든 것들을 개신교와 공유한다는 이유때문에 거부합니까? 전혀 안그렇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렇게 많이 닮은 것을 기뻐해야 합니다. 우리는 비록 어떤 다른 점들이 있기는 하지만, 결국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 형제이며 자매인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굳이 교회의 자료들을 인용할 것도 없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많은 것을 공유하는 것이 기뻐할 일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사실인즉, 우리가 모든 것을 공유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 오히려 문제이며, 이는 그리스도께서 “아버지, 이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라고 기도 하셨듯이, 주님안에서의 궁극적 화해를 청하는 기도의 과제가 되는 것입니다.

 

혹자는 성령쇄신을 따르기 보다는 어떤 개인적인 계시를 따르는 것에 보다 자신감을 얻는다고 합니다.

보다 근본적인 신앙문제는 우리가 말씀에 확실히 기초해서 부활하신 주님과 성령을 개인적으로 체험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전통적인” 신앙 방식들에서 그러한 결실을 맺으신다면, 훌륭합니다!! 주님은 여러가지 방법으로 역사하시며, 우리는 모든 진실된 영성들을 존중합니다.

 

혹자는 이르기를 은사수행자들은 고해성사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것같다고 합니다.
가톨릭 성령쇄신의 초기 책자들중의 하나는 스캔런 신부에 의해서 쓰여진 고해성사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가톨릭 성령쇄신 대회장에서의 고해성사 대기라인은 매우 긴 것이 보통입니다. 고해성사는 성령쇄신의 역사를 통틀어 매우 중요시 여겨져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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